감성만랩 AV아카이브 - 이도공간 역시.인문 | 고려 난파선 발굴 현장, 숨겨진 역사가 깨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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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인문 | 고려 난파선 발굴 현장, 숨겨진 역사가 깨어난다!
작성자 거륜巨輪 (76.80.157.50) 24-08-30 00:02 조회53회 댓글0건
신라 경주 복원도

개 목걸이도 금으로… ‘황금의 나라’ 신라.
중세 이슬람 지리학자인 알 이드리시(1099~1166)는 <천애횡단 갈망자의 산책(일명 로제르의 서)>에서 신라의 황금 문화를 언급했다. “신라를 방문한 여행자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금이 너무 흔하다. 심지어 개의 사슬이나 원숭이의 목테도 금으로 만든다.” 일본의 고대역사서 <일본서기>는 “눈부신 금은 채색이 신라에 많다”고 적고 있다.
신라는 흔히 ‘황금의 나라’로 불린다. 화려한 장식의 금관은 물론 허리띠·귀고리·목걸이 팔찌·신발·그릇 등 온갖 금, 금동제 유물이 출토됐기 때문이다. 특히 마립간 시기(4세기 중반~6세기 초반)의 황금 유물은 고구려, 백제를 압도하는 것은 물론 같은 시기 세계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많이 출토된다.
신라는 흔히 ‘황금의 나라’로 불린다. 화려한 장식의 금관은 물론 허리띠·귀고리·목걸이 팔찌·신발·그릇 등 온갖 금, 금동제 유물이 출토됐기 때문이다. 특히 마립간 시기(4세기 중반~6세기 초반)의 황금 유물은 고구려, 백제를 압도하는 것은 물론 같은 시기 세계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많이 출토된다.
한반도 경제나 문화의 수준이 가장 찬란했던 시기는 신라와 고려시대다, 신라는 멕시코의 엘 도라도(El dorado)에 비견될 만큼 황금이 많이 샌산 되었고, 대외 해상무역이 발달했었다, 경주의 상당수 사람들은 숯불로 요리를 했고, 비가 쏱아질 땐 우산없이 처마 밑으로만 다녀도 비에 젖지 않을 정도였다,
경제, 문화적으로도 동아시아에서 가장 찬란 했었다,
고려시대도 흡사했던 바, 사농공상 최악의 조선시대와 달리 상업과 무역이 발달 했었다, 기록에 따르면 고려는 중국에 과하마(果下馬)를 한 번에 8천필 씩 수출하기도 했을 만큼 마필 생산도 막대했다, (과하마는 과일나무 밑으로도 갈 수 있을 만큼 키가 작고 희귀한 말의 한 품종이다. 키는 작지만 무거운 짐을 잘 지고 산길을 잘 걷는다)

조선 시대에는 천민과 양반, 남녀 차별도 심했다. 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다는 ‘남존여비’와 아내는 반드시 남편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여필종부’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상당히 낮았고 활동도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고려시대 여성은 자신의 재산을 소유하여 주체적으로 살았다. 혼인을 하면 남편의 집에서 살아야 했던 조선 시대와 달리 혼인 후라도 여성이 자기의 부모님과 함께 살기도 했다.

정몽주의 집터
고려는 위 영상에서 보여지듯 도자기 산업을 비롯 전 분야에 걸처 신라와 함께 르네상스기를 보냈다, 그 후 헬조선은 성리학을 신주 모시듯 하며 문 닫아 걸고 재사만 지내고, 양반, 상놈 타령하며 나홀로 에헴! 스스로 가난의 질곡 속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
고려와 신라가 현금 대한민국 이라면, 조선은 그야말로 북한 수준이었다고 보면 그리 틀리지 않는다,
국가를 구동 시키는 이념이 얼마나 무서운지 고대사에서도 충분히 보여자고 있다, 이런 교훈을 얻지 못함은 구제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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